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리역 폭발사고 사건 사망자 꼬꼬무 하춘화 이주일

반응형

이리역 폭발사고 사건

21일 SBS 꼬꼬무 에서는 이리역 폭발사고 사건에 대해 재조명 합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 입니다.

1977년 11월 9일 인천을 출발,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화약열차는 10일 11시 31분

다른 열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었는데 당시 철도역 화차 배차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자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다고 합니다.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신 씨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했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술을 마신 뒤 화약열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화물열차 속이 어둡자 신 씨는 촛불을 화약상자에 세워 놓은 뒤 침낭 속에 몸을 묻고 잠에 빠져 들었고 끄지않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었습니다. 이어 잠에서 깨어난 신 씨는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습니다.

화약 열차에 불이 붙자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열차에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탄 등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폭발한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합계 1,250상자 30톤분이 실려 있었는데...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역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합니다.
또한 구내에 있던 객차·화물열차·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습니다.


이때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 씨는 폭발 때문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곧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하며 이 일 때문에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에 달합니다. 피해 가옥 동수는 전파가 811동, 반파가 780동, 소파가 6,042동,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원에 달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되었습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이후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구성되어 재해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고 박정희 정부는 천막촌을 건설하여 이재민을 수용했고,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이었던 약 90억 원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시켰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재해 기금으로 갹출 했다고 합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씨는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1987년 만기 출소했습니다. 그런데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하던 신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민병권이 임명되었습니다.

여담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 사고가 일어나 극장 지붕이 무너져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이주일은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았는데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아버지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고 권유해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합니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으로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입니다.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