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해 프로필 백백교 사건 동굴 머리 고향
전용해는 일제강점시절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의 교주이다.
전용해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1912년 아버지 정정운이 사이비종교인 백도교를 창시하자 이에 가담했다. 1919년 백도교의 교주인 전정운(1868 ~ 1919)이 사망한 후 교주 자리를 놓고 장남 전용주, 차남 전용해(1895? ~ 1937?), 3남 전용석 등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독립했다. 당시 전용해는 1923년 우광현을 형식적인 교주로 삼고 경기도 가평에서 백백교를 창시했다.
이후 1930년에 죽은 전정운이 자신의 첩 4명과 신도 일가족 8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을 비롯해 여러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 이들은 한 차례 철저하게 박살났다.이 와중에 차남 전용해는 무사히 도망쳤다가 돌아와 비밀리에 백백교를 재건했다.
백백교는 종말의 날에 서양은 불, 동양은 물의 심판을 받아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가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으로 옮겨가면 대원님(백백교 교주)이 불로장생하고자 하는 자는 동해 천리 밖의 신대륙 영주로 보내주고 부귀영화를 원하는 자는 계룡산으로 인도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교리를 설파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상황 속에서 사회가 혼란했고 평균적인 사람들의 교육 수준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고 속여 사람들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당시에도 나왔던 고전적 수법으로, 조선시대 후기 각종 예언서들이 횡행할 때 유행한 해도진인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전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며 불로장생과 부귀영화를 미끼로 신도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는 등 사기행각을 벌여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를 속여 간음을 일삼았다.
이어 스스로 교주가 되면서 횡포를 더하여 '대원님'이라 자칭하고, 서울에 포교 본부를 두고 김두선등 10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관헌의 눈을 피하여 신도의 재산을 빼앗고 변태적 방법으로 여신도들을 농락했다. 이뿐 아니라 탈교하거나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신도 314명을 살해하여 생매장했다.
1937년 첩의 오빠인 유곤룡의 고발로 이경득·문봉조 등 간부가 일망타진되고 전용해는 수사가 착수되자 피신하여 도망치다가 경기도 양평의 도일봉에서 자살했다.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 사건의 선고 공판 결과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12명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십수 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백백교 사건은 종결되었고 교단도 해체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위의 간부급 살인마들에게 진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재판 직후 일본 제국에 더 중대한 일인 태평양 전쟁과 8.15 광복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은 이들에 대해 크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광복 이후에는 당연히 관여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간부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이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다른 간부들은 8.15 광복과 함께 1945년에 모두 출옥했다.
총독부는 이 사건이 전국에 충격적인 화제로 떠오르자 신종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이 있는 종교단체를 해체시키는 구실로 삼았다.
한편 전용해의 두개골은 일제 경찰에 의해 범죄형 두뇌의 표본으로 만들어져 해방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인수받아 보관 해왔는데, 불교단체 모니노가 행정안전부에 인체 표본 전시가 비인도적이라는 진정을 하여 인체 표본 폐기 결정이 났다.
이후 그의 두개골은 사망 70년 만인 2011년 10월 25일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됐다. 모니노는 이어 10월 27일에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그의 위령제를 봉행했다.
2014년 유병언의 시신이 발견된 후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잠깐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둘의 시신이 발견된 경위가 유사했기 때문에 닮은 꼴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